
[리뷰] 무용극 ‘홍등’
장이머우 감독 감각적 연출
서양 틀 안에 중국 발레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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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쳐졌다. 뒤편에서 쏘여지는 조명, 남녀 주인공은 어느새 그림자로만 움직였다. 빛이 다가가고 멀어짐에 따라 커졌다 작아지는 형상은 마치 관객의 심박수처럼 요동쳤다. 둘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듯 어두움이 드리어지려는 순간, 여자는 “퍽”하니 막을 찢고 그대로 무대로 튀어나왔다. 남자도 찢고 나왔다. 그건 마치 세계 무용의 중심부를 향한 중국 발레의 솟구침, 그 자체였다.
장이머우(張藝謀·58) 연출의 무용극 ‘홍등(사진)’이 마침내 한국에 입성했다. 중국 발레는 지금껏 기교면에선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았으나 이념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곤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등’은 중국 창작 발레가 서양 발레에 주눅 들지 않고 새로운 발레의 전형을 창조해내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2001년 초연된 ‘홍등’은 사실 철저히 해외를 겨냥해 만들어진 기획물이다. 수십억 원의 예산이 투여된, 중국 정부의 ‘무대예술정품공정’이 우선 큰 우산이 됐다. 중국 국립발레단의 숙련도와 장이머우의 감각적 연출력은 안무의 빈약함을 보충했다. 세계적 영화감독의 첫 발레 연출이라는 홍보 문구가 더해졌다. 게다가 한국 공연은 절묘하게도 베이징 올림픽 직후다. 세간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장이머우는 영리했다. 영화 속 인물 설정을 과감히 폐기시켰다. 고전발레 형식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영화 속 네 명의 부인은 세 명으로 줄어들었고, 자연히 영화 속 공리가 맡았던 넷째 부인도 발레에선 셋째 부인이 맡아 여주인공이 됐다. 또한 셋째 부인의 옛 연인인 경극 배우를 무대 전면에 배치한 것이나, 남편인 영주의 악역성을 강조한 점 등도 영화와 판이하다. 이를 통해 형성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아련함은 고전 발레 이야기틀과 동일해졌다. 단순하되 갈등적인 인물 관계 역시 토슈즈를 신은 여주인공과 경극 배우의 파드되(2인무), 죽음에 직면한 둘째 부인과 남녀 주인공의 3인무를 가능케 했다.
장이머우의 연출 의도는 디베르티스망(발레에서 줄거리와 크게 상관없는 볼거리용 춤)을 경극으로 대체한 부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건 발레의 정통성을 그대로 쫓으면서도 결코 중국성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함같은 것이다. 해외활동 경력이 풍부한 왕신펑(안무가)·천치강(작곡가)은 물론 프랑스 의상디자이너 제롬 카플랑 등의 합세는 ‘세계화’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경극음악에 맞춘 경쾌한 발동작 뒤에 현대무용 2세대 마사 그레이엄의 ‘수축과 이완’기법이 거칠게 연결되는 장면 등은 세련미가 부족하긴 했으나 동·서양의 만남을 위한 노력의 결정판이었다.
되돌아보면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고전 발레가 꽃을 피웠던 이유는 황실의 전폭적 지원, 관객을 의식한 연출, 완벽에 가까운 형식미를 강조한 테크닉, 고전주의에 입각하면서도 요정·마법 같은 낭만적 요소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100여 년이 지난 ‘홍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 장이머우의 천재적 연출, 기교가 뛰어난 무용수, 직접적인 이념 표출의 억제 등의 특징이 그러하다. 철저하게 고전의 형식을 고수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담아낼 수 있음을, 서양의 틀 안에서도 중국의 내용이 스며들 수 있음을, ‘홍등’은 한국 무용계에 붉은 빛처럼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17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시작된 ‘홍등’ 한국 공연은 대전 문화예술의전당(21, 22일)·고양아람누리극장(24, 25일)·경기도 문화의전당(27일)·국립극장 해오름극장(29, 30일)으로 이어진다.
장인주(무용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