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한국데뷔 10년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
  • 등록일2009-03-13| 작성자 관리자

[AM7 초대석]“내 음악은 그다지 비싸지 않은 초콜릿”
한국데뷔 10년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
오승훈기자oshun@munhwa.com

▲사진=김선규기자

꼭 10년 전이다. 1999년 5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한 이방인이 올랐다. 일본에서 찾아온, 작은 체구에 턱수염을 기른 남자. 겉으로 봐선 인상 깊은 대목이 별로 없는 밋밋한 피아니스트. 그런데 그의 피아노 건반이 탄력 있게 청명한 소리를 빚어내면서 이내 풍경화가 완성되기 시작했다.

한 소녀가 작은 집들이 서로 토닥토닥 거리는 골목길을 걷고 있는 풍경, 긴 여름 장마가 끝난 뒤 오후 햇빛을 즐기는 짙푸른 숲의 정경이 떠올랐다. ‘거울 앞에선 내 누님’도 거기 있었다. 그 공연은 전석 매진을 기록했고, 그의 이름은 뉴에이지 음악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그가 유키 구라모토(58)다.

이후 그가 빚어낸 서정적인 멜로디는 각종 광고와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였고, 한국에서 발매된 13장의 음반 가운데 6장이 플래티넘(100만장 이상)을 기록했다. 그의 공연도 지난 2003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유료 관객 점유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매번 성황을 이뤘다.

그가 최근 한국 공연데뷔 10주년을 맞아 ‘화이트 데이 콘서트 전국 투어―로맨스’를 진행하고 있다. 대구(7일), 마산(8일)을 거쳐 14일 오후 2시30분·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7일 오후 8시 의정부 예술의전당 공연을 남겨놓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난 그는 10년전 모습에서 머리카락이 반백으로 변했을 뿐, 이제는 제법 한국말 인사를 매끄럽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을 뿐, 소년처럼 해맑게 웃는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10년이 흐른 나이듦에 대해 “그 시간이 준 경험이 내 음악을 키웠다”는 그는 “내 음악은 고급스러우면서도 그다지 비싸지 않은 초콜릿”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가끔 먹는 고급 요리와 달리 평소 먹는 음식 중에서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 같은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국 관객들이 내 음악을 인정해줘서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내 음악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젊은 관객이 많다는 게 인상적입니다. 한국에서는 내 음악을 뉴에이지로 분류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나는 클래식에 기반을 둔 듣기 쉬운 편안한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입니다. 팝음악 처럼 곡이 길지 않고, 멜로디가 있는 피아노 음악이지요. 그래서 한국 관객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편안한 느낌의 멜로디가 주조를 이루는데요.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장르의 음악을 좋아해요. 다만 교향곡을 예로 들자면, ‘이거 대단하지’라고 주장하는 듯한 음악적 요소를 나는 작품에 넣지 않아요. 세상에는 난해한 음악들이 있는데, 그런 음악들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 싫어서죠.”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작품들처럼 ‘달콤한 인생’을 살아왔을까. 이 질문에 그가 펄쩍 뛰었다. “한마디로 좌절의 연속이었다. 다만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란다.

그의 이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과대학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1951년 일본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연주하며 재능을 보였지만,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피아노를 살 여력이 없어 학교를 연습실로 택했다. 추운 겨울에도 꽁꽁 언 손가락을 부비며 연습해야 했고, 피아노를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을 자리가 없어서 절망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결국 고교를 졸업한 뒤 음대 진학을 포기하고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인 도쿄 공업대학 응용물리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도 그는 음악 클럽에서 돈 벌이를 계속했다. 남들처럼 공대를 졸업한 뒤 안정된 일자리를 찾는 보통의 삶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 시작됐다. 클럽이나 호텔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혹은 짧은 작품을 써주기도 하고, 음악과 관련된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해치우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늘 불안정했다. 일감이 들어오다가도 느닷없이 끊기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잃기 일쑤였다. 게다가 작곡과 편곡을 독학으로 깨쳐야 했다.

그런 고난의 시절이 지나면서 그의 음악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980년대 후반부터 그의 작품들이 일본 드라마 음악으로 소개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마침내 1989년에는 첫 음반을 낼 수 있었다. 38세의 늦깎이 데뷔였지만, 오히려 젊은 시절의 담금질이 빛을 발했다. 클럽을 전전하는 아마추어 연주자에서 대중을 휘어잡는 거장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천적인 재능을 우선시하는 음악인에게도 ‘자수성가’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아마 그를 첫 손에 꼽아야하지 않을까.

-신산한 삶이 음악적 영감을 주는 밭이군요.

“음악도 인간의 행위라서 마음속의 고향이 있다면 곡을 쓰기 쉬워집니다. 내 음악은 로맨스에 대한 동경, 대자연에 대한 숭배가 중심입니다. 지금은 내가 나이가 들어서 로맨스를 동경하기는 힘들겠죠(웃음). 그렇다고 해서 음악이 감성적인 것만으로 쓰이지는 않아요. 감정만 고양된다고 영감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매우 수리적인 것입니다.”

-레퍼토리들이 대부분 비슷한 분위기인데, 어떻게 관객들에게 새로움을 선보이는지.

“뉴에이지 계열의 음악들은 단순해지기 쉬워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장르의 요소를 가져오면 오히려 내 음악이 되지 않아요. 따라서 내 음악의 특색을 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것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인기 있는 음악과 음악가가 추구하는 음악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하는 균형을 맞추기가 매우 힘듭니다.”

-대중들이 원하는 음악만을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음악가는 대체로 대중을 대상으로 만든 작품을 듣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그 음악을 좋아서가 아니라 일로 생각해서 만든 경우지요. 하지만 나는 내 음반을 즐겨 들어요. 내가 먹어도 맛있는, 내게도 맞는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그와 만남을 마무리 지으며 그의 화두중 하나인 ‘로맨스’를 물었는데, “사생활을 이야기 하면 요즘 같은 세상에는 너무 많은 오해와 억측을 낳더라”며 조심스러워 했다. 그의 음악 보다 신변잡기를 더 탐닉하는 세태를 그 역시 경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멋진 사랑을 만나면 연락해달라”는 ‘덕담’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살벌한 세상의 눈초리에 음악적 영감이 짓눌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오승훈기자 oshun@munhwa.com

[문화뉴스]2009-03-13/오승훈기자 osh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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